1. 임상 1상의 목적과 한계
신약 개발 과정은 일반적으로 전임상(동물실험 등 비인체 실험)을 거친 후 사람을 대상으로 한 임상시험을 해야한다. 그중 임상 1상(First-in-Human, FIH)은 신약 후보 물질이 처음으로 사람에게 투여되는 단계다. 이 단계에서는 약물이 인체에 안전한지, 어느 정도의 용량까지 투여할 수 있는지를 확인하며, 약물이 체내에 들어가 어떻게 흡수되고(Absorption), 어디에 퍼지고(Distribution), 어떤 방식으로 분해되고(Metabolism), 어떻게 배출되는지(Excretion) 등 약물의 이동 경로를 정밀하게 파악(PK, 약동학)한다.
또한 약물이 몸 안에서 어떤 생리적 반응을 일으키는지(PD, 약력학)도 확인한다.
그러나 이 과정은 평균적으로 수십억 원 이상의 비용과 수개월에서 수년의 시간이 필요하다. 더욱이 건강한 지원자에게 안전성이 완전히 검증되지 않은 약물을 투여해야 하므로 윤리적인 문제도 따르며, 예기치 않은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는 리스크(위험 요소)도 존재한다. 이처럼 임상 1상은 신약 개발에서 필수적이지만 가장 부담이 큰 과정이기에, 이를 대체하거나 보완할 수 있는 새로운 기술로 In Silico Clinical Trial(인 실리코 임상시험)이 주목받고 있다.
2. In Silico는 무엇을 어떻게 시뮬레이션하는가?
In Silico 임상시험은 '실리콘(컴퓨터 칩)' 안에서 이루어지는 임상시험이라는 뜻으로, 실제 사람에게 약물을 투여하는 대신 컴퓨터 모델을 활용해 가상의 인체 실험을 수행하는 것이다. 이 기술은 고성능 컴퓨터와 수학 모델, 생리학 정보, 그리고 인공지능(AI) 알고리즘 등을 결합해, 가상의 인체와 가상 환자군을 만들어 놓고, 신약 후보물질을 투여했을 때 나타날 수 있는 다양한 반응을 미리 계산해낸다.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기술이 PBPK 모델링(Physiologically Based Pharmacokinetic Modeling)인데, 이는 인체의 장기, 혈류, 효소 작용, 대사 경로 등 실제 생리적 구조와 기능을 수학적으로 표현한 모델이다. 이를 통해 약물이 간, 신장, 뇌 같은 기관에서 어떤 경로로 이동하고, 얼마나 머무르고, 어떤 영향을 주는지 등을 정밀하게 예측할 수 있다. In Silico 기술은 신약의 용량별 반응, 독성, 약물 간 상호작용, 기대 효과 등을 실험하지 않고도 시뮬레이션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장점을 가진다. 특히 실제 임상 1상에서는 확인하기 어려운 극단적인 시나리오(예: 고령자, 신장 기능 저하 환자 등)까지도 모의 실험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일부 글로벌 제약사들은 이미 In Silico 분석 결과를 기반으로 임상 설계를 조정하거나, 불필요한 후보물질을 사전에 걸러내어 시간과 비용을 크게 줄이고 있다.
3. In Silico의 실제 적용 사례와 한계점
전 세계적으로 In Silico 임상시험은 점차 실용화되고 있으며, 주요 규제기관들도 이를 일부 수용하고 있다. 예를 들어 미국 식품의약국(FDA)은 희귀질환 치료제 개발에서 환자 수가 워낙 적어 전통적 임상시험이 어려운 경우, In Silico 모델을 활용해 가상의 환자군을 구성하고 분석한 결과를 자료로 제출하는 것을 허용한다.
실제로 낭포성 섬유증(Cystic Fibrosis) 치료제 개발에서는 이 방식이 활용되었고, 초기 안전성 데이터의 보완 수단으로 인식되었다. 유럽의약품청(EMA) 역시 항암제 개발 과정에서 PBPK 모델을 바탕으로 독성을 예측한 결과를 평가에 반영한 사례가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 In Silico 모델이 임상 1상 전체를 완전히 대체하는 수준에 이르렀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 이유는 첫째, 모델을 구성할 고품질의 환자 데이터가 부족하다는 점이다. 특히 개인별 유전 정보, 체질, 기저질환 등 변수들을 충분히 반영하려면 다양하고 정밀한 생체 정보가 필수적이다. 둘째, 모델링 기술을 신뢰할 수 있을 만큼의 국제 표준화와 규제기관의 승인 체계가 아직 미비하다. 현재 대부분의 규제기관은 In Silico 결과를 참고자료로는 받아들이고 있지만, 이를 기반으로 실제 임상시험을 생략하게 해주는 사례는 드물다. 결과적으로 In Silico는 아직까지는 임상 1상을 대체하기보다는 보완하거나 설계를 효율화하는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
4. 미래 가능성과 한국의 과제
그럼에도 불구하고 In Silico 임상시험은 향후 임상 1상의 일부 혹은 전부를 대체할 수 있는 가능성이 크다. 인공지능과 생명정보학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앞으로는 개별 환자의 유전자 정보, 질병 이력, 환경 요인 등을 모두 반영한 '디지털 트윈(Digital Twin)' 수준의 가상 인체 모델이 현실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미국 국립보건원(NIH)과 같은 기관에서는 In Silico 임상시험을 규제기관이 공식 인정하는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검증 프레임워크와 신뢰도 기준을 만드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보건복지부는 In Silico 기술을 디지털 헬스케어 핵심 기술로 지정하고, 데이터 인프라, 인력 양성, 제도 개선을 위한 투자를 시작했다. 서울대병원, 연세의료원, KAIST 등에서는 약물반응 시뮬레이션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으며, 일부 바이오 벤처 기업은 미국이나 유럽의 제약사와 협력해 자체 In Silico 모델을 상용화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국내에는 데이터 표준화 부족, 규제 미비, 전문 인력의 한정성이라는 과제가 존재한다. 이러한 요소들이 해결된다면 In Silico 임상시험은 임상 1상의 리스크와 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이는 대안이 될 수 있으며, 특히 희귀질환, 소아 질환, 고위험 약물군과 같은 분야에서 먼저 상용화가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다. 지금은 과도기이지만, 규제기관의 정책 변화와 기술적 진보가 이어진다면, 컴퓨터 속 임상시험이 현실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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